왜 AI 스크라이브 시장에 뛰어들었나

진료실에서 의사의 시간이 어디에서 사라지는지 본 뒤, 이 문제는 반드시 풀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영찬2026년 5월 17일

의대 실습을 하면서 가장 많이 본 화면은 환자의 얼굴만큼이나 EMR 화면이었습니다. 외래 참관을 할 때도, 병동 실습 중 이전 기록을 확인할 때도, 진료의 많은 순간은 결국 기록을 읽고 쓰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학은 기록의 학문이고, 좋은 기록은 좋은 진료의 기반이니까요. 그런데 매일 EMR을 들여다보고 교수님의 외래 진료를 가까이에서 보면서, 점점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기록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병목은 기록을 만드는 방식에 있었습니다.

진료는 끝났는데, 차팅은 끝나지 않았다

교수님 외래에는 환자가 끊임없이 들어왔습니다. 한 명을 보고, 설명하고, 다음 환자를 맞이하기 전까지 아주 짧은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교수님은 방금 전 대화를 머릿속에서 다시 정리하고, 핵심 증상과 판단과 계획을 EMR에 옮겼습니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환자를 보는 일은 의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방금 나눈 대화를 구조화하고, 정해진 형식으로 정리하고, 표현을 다듬어 입력하는 일은 꼭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해야 하는 일일까.

저는 그 시간이 낭비처럼 느껴졌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의사의 고급 판단이 필요한 시간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진료를 문서 형태로 변환하는 데 쓰이는 시간이었습니다.

차팅은 AI가 자동화할 수 있는 작업이다

저는 일을 볼 때 업무와 작업을 나누어 생각하려고 합니다. 업무는 사람이 책임지고 판단해야 하는 본질적인 일입니다. 반면 작업은 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따라붙는 반복적인 처리입니다.

의사의 업무는 환자의 말을 듣고, 진찰하고, 의학적 판단을 내리고, 치료 방향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차팅은 그 업무의 결과를 남기는 데 필요한 작업입니다. 중요하지만, 모든 문장을 사람이 손으로 처음부터 작성해야만 가치가 생기는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AI는 이런 작업을 잘합니다. 대화를 듣고, 핵심 정보를 추출하고, SOAP 같은 형식에 맞추고, 빠진 내용을 확인 질문으로 바꾸는 일은 언어 모델이 강점을 갖는 영역입니다. AI 스크라이브의 가치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의사가 해야 할 업무에 더 집중하게 만들고, 반복 작업을 뒤로 물리는 것입니다.

의사의 시간은 차팅과 클릭 속에서 사라진다

진료실에서 사라지는 시간은 차팅 시간만이 아니었습니다. 과거 기록을 찾기 위해 이전 외래 기록을 열고,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서류를 찾고, 다시 현재 화면으로 돌아오는 클릭도 계속 반복됐습니다.

환자 앞에서 의사가 화면을 오래 바라보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환자를 제대로 보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여러 화면 속에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시간을 줄이고 싶었습니다. 의사가 과거 문서를 찾고, 방금 한 말을 정리하고, 입력창을 오가느라 쓰는 시간을 줄이면 그 시간은 다시 환자와의 대화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한국 시장은 미국과 다르다

AI 스크라이브를 이야기할 때 미국 사례가 자주 언급됩니다. 미국은 Epic, Oracle Health 같은 대형 EMR 사업자가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고, 대형 시스템과의 연동을 중심으로 제품이 확산되는 흐름이 있습니다.

한국은 구조가 다릅니다. 대학병원마다 EMR을 개별적으로 구축하거나 커스텀해 온 역사가 길고, 병원 내부 시스템의 형태도 제각각입니다. 하나의 API endpoint를 붙이면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그림을 그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완전한 EMR 연동을 전제로 제품을 만들면, 실제 사용자에게 도달하기 전에 병원별 연동 협의와 개발의 벽에 막힐 가능성이 크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첫 형태는 비연동이다

Charting의 초기 형태는 API 비연동입니다. 진료 대화를 녹음하고, AI가 의사가 바로 검토할 수 있는 노트를 생성합니다. 의료진은 결과를 확인하고 필요한 부분을 수정한 뒤 EMR에 복사해 넣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것이 완전 자동화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병원 시스템을 바꾸기 전에 의사가 오늘 당장 체감할 수 있는 시간을 줄이는 것입니다.

연동은 궁극적으로 필요합니다. 다만 시작점은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EMR을 건드리지 않고도 차팅 시간을 줄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큰 첫 번째 개선입니다.

목표는 의사의 업무 강도를 낮추는 것이다

제가 AI 스크라이브 시장에 뛰어든 이유는 단순히 차트를 자동으로 써주는 기능이 멋져 보여서가 아닙니다. 의사가 저부가가치 작업에 덜 시달리고, 고부가가치 업무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의료는 결국 사람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환자가 말하고, 의사가 듣고, 판단하고, 설명하는 과정이 중심이어야 합니다. 기술은 그 중심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반복 작업을 조용히 치워주는 방향으로 쓰여야 합니다.

Charting은 그 방향에서 시작한 제품입니다. 의사가 화면보다 환자를 더 오래 볼 수 있게 만드는 것. 진료 후 남는 피로를 줄이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진료 기록 업무가 지금보다 훨씬 가볍게 느껴지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것이 제가 이 시장에 뛰어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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